카테고리 없음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온 한 뿌리의 가족인가? 부여와의 친연성

떠돌이스머프 2023. 11. 1. 15:16

 

지린성 서단산, 동단산 유적지에서 출토된 부여 유물.

 

오늘은 언어학과는 조금 다른, 그러나 연관된 고대사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계승의식과 관계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백제의 개로왕이 472년에 북위에 전달한 국서가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개로왕, 《북위서》 <열전>, 그리고 《동문선》에 이를 나타내는 기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에서 유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의 추모성왕은 그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 동명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심지어는 건국신화 역시 동명왕 신화를 빌려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백제는 왕가의 성이 '부여'였으며,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할 정도로 부여로부터의 계승성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비성이 위치했던 지역의 현재 이름도 '부여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시조인 동명성왕 고주몽이 부여 왕가와 혈연관계(고주몽과 해부루는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이복형제)를 가진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부여 왕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다른 가문으로 자신을 설정하였고, 부여의 후손이라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부여와의 적대 관계를 겪었던 고구려 초기의 역사 및 후기에 부여를 압도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의 후손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두 국가 간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단계인 여제동맹 구조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었다는 인식이 강하나, 이는 멸망 직전의 몇 십 년 동안의 관계일 뿐입니다. 이들의 동맹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적으로 형성된 것이었으며, 실제로 백제와 신라가 서로 왕가를 통혼하였던 사례가 한국사에서 유례없이 굳건한 동맹의 신호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들의 동맹도 결국에는 깨지고 원수가 되었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왕조의 존속기간 동안 신라와의 갈등보다 여제 간의 적대 관계가 훨씬 긴 시간을 차지하였습니다. 현대의 남북한 관계도 마찬가지로,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친밀한 외교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2. 고고학적 친연성

1) 고구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구려의 경우, 그들의 건국 초기 지배층은 묘제가 부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견된 무기류와 장신구는 모두 부여 포자연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동안의 부여 지배층과의 강력한 연관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점은 고구려 지배층이 부여에서 출발한 전사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되며, 이에 대한 이견이나 반박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고구려의 원류 소수맥 지역에서는 주몽이 도착하기 100년 전인 기원전 2세기에도 부여에서 유입된 집단의 남하가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은 문헌적 자료와 일치하여 홀본부여 건국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고구려를 창건한 사람들이 부여에서 온 것은 문헌학과 고고학 모두에서 입증되는 사실입니다.

고구려 최초 도읍지인 졸본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

 

 

2) 백제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구려의 경우, 그들의 건국 초기 지배층은 묘제가 부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견된 무기류와 장신구는 모두 부여 포자연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동안의 부여 지배층과의 강력한 연관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점은 고구려 지배층이 부여에서 출발한 전사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되며, 이에 대한 이견이나 반박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고구려의 원류 소수맥 지역에서는 주몽이 도착하기 100년 전인 기원전 2세기에도 부여에서 유입된 집단의 남하가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은 문헌적 자료와 일치하여 홀본부여 건국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고구려를 창건한 사람들이 부여에서 온 것은 문헌학과 고고학 모두에서 입증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백제와 고구려 간의 연결성은 무덤의 유사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백제가 고구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백제 왕실의 공식 주장, 즉 백제는 고구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부여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와 동등하다는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초기 한성백제에서는 묘제나 장비에서 부여와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토광묘제가 일시적으로 부여와 동일하다는 증거로 제시되었지만, 이는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가 부여에서, 백제가 고구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고고학적으로는 맞지만, 이는 백제 왕실의 공식 주장과는 다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고고학자들의 고민입니다.

 

일부 이론가들은 부여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순서를 고려하여 백제가 결국 부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주장은 부여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별도의 경로를 강조하며, 이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고구려의 무관심하거나 모욕적인 반응은 또 다른 생각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백제 초기 적석총 유적인 석촌동 고분군.

 

 

3. 백제와 부여의 연관성

1) 건국신화 속에서

백제의 창건신화, 즉 온조 시조설에서는 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소서노와 결혼, 고구려를 세우고 이후에 북부여에서 유리명왕이 내려와 왕위를 물려받자 소서노와 그의 자식들이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실제로 사실이었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동시에 북부여가 아닌 '홀본부여'에서 출발했다면, 백제도 고구려처럼 부여와의 물질 문화적 연결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연결성은 입증되지만, 백제와 부여 사이의 연결성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가 부여의 계보를 이었다는 주장이 거짓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부여씨가 고구려에서 몇 세대 동안 머물렀다가 서기 2세기 중반에 고구려에서 떠나 백제의 지배층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건국연도를 조작하고, 직접 부여를 계승한 것처럼 신화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2) 기타

한편으로, 한성 백제가 목지국을 제거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며 마한의 강국으로 부상했던 3~4세기경에 흡수한 경기, 강원, 충북 일대의 동예 소국들의 물질 문화에서는 부여의 영향이 일부 보입니다. 이는 부여가 고구려 등 여러 국가에게 공격을 받아 피해 온 부여 유민들의 영향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점에 백제의 직접 지배하거나 간접 지배하던 지역의 호족이었기에, 백제의 건국신화와는 다소 맞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역사학자들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초기 백제 유물